앱테크 캐시워크 토스퀴즈 [일본] 사쓰마번 (薩摩藩) 과 유구통보 .....나마무기 (生麦)사건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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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사쓰마번 (薩摩藩) 과 유구통보 .....나마무기 (生麦)사건 (1)

화 수 분 2021. 10. 23. 1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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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수분입니다.

이번에 일본이 역사에 대해서 이야기 해 보겠습니다. 물론 화폐하고도 관계가 있습니다.여러분 왜 일본은 다른 아시아 국가들과 달리 서구열강의 식민지화가 되지 않았을까요 ? 한가지 중요한 사건으로 인하여 일본의 조선이나 청과 달리 서구열강의 식민지화의 길로 가지 않게 됩니다. 일본의 특유의 통치제도 인하여 천황은 있지만 형식적인 존재 였고 실재 통치는 유력한 번주중 하나가 통치를 하는 막부체제의 국가였습니다.. 예전 주나라의 봉건제도와 비슷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임진왜란 이후 일본의 막부체제도 큰 변화를 겪게 됩니다. 기존 토요토미 히데요시에서 도쿠가와 막부로 변환을 하게 됩니다. .결국 도카가와 막부에 의해 천하는 통일되었지만 지방은 여전히 각 번의 번주(다이묘)에 의해 통치를 받게 됩니다.. 일본 근대시대에서는 두개의 중요한 번주가 나타나게 됩니다. 사쓰마번薩摩藩과 죠슈번입니다.(당시 일본에는 200여개의 번이 있었습니다.) 그 두개의 번은 규슈 최남단 사쓰마번(薩摩藩), 혼슈 최남단 조슈번(長州藩)과 함께 에도시대의 서남웅번(西南雄藩)으로 불렸다고 합니다 .. 그 중 오늘 다룰 번은 사쓰마 번薩摩藩입니다..현재 일본 큐우슈우 섬의 가고시마현 지역이었죠..요즘은 화산폭발로 유명한 곳이죠 …^^

사쯔마 번은 임진왜란을 계기로 류큐왕국(오키나와 일대 섬)을 정벌하여 류큐왕국을 속국으로 만들어 버립니다..(임진왜란이 왜 계기가 되었는지 나중에 다른 게시글로 다루겠습니다..)류큐를 점령한 사쓰마는 매년 엄청난 규모의 조공을 요구하였고 막대한 조공을 바치기 위해서 류큐왕국은 백성들에게 무거운 인두세를 부과하였고. 인두세가 워낙 감당하기 힘들어 일부 백성들은 어린 자식이나 늙은 부모를 죽이기까지 할 정도였다고 합니다...사쓰마가 침략하기 이전부터 류큐왕국은 청나라 명나라에 조공을 바치고 있었고 조선도 그랬지만 그 당시 중국에 조공을 바치고 받아오는 답례품이 조공품 몇 배가 되었을 뿐 아니라, 훨씬 값진 물품이었기 때문입니다... 중국의 이런 값진 조공답례품을 챙기기 위해서 사쓰마는 류큐를 속국으로 만들어 놓고도 대외적으로는 독립왕국처럼 보이게 했고 그런 감시감독을 철저히 하기 위해서 류큐에 류큐재번봉행(琉球在番奉行)을 두었던 것입니다. 실제로  청나라는 19세기중반까지 이런 사실을 까막게 모르고 있었다고 합니다.. 사쯔마 번은 류큐복속이후 계속 적으로 류큐왕국에 지속적인 내정 간섭과 경제적 약탈을 가하게 됩니다.결국 사쓰마의 이런 수탈에 의해 결국 류큐왕국의 경제는 파탄에 빠지게 됩니다. 이에 사쓰마 번은 류큐왕국의 경제 파탄을 막기위해 중앙정부(도쿠가와막부)에 요청하여 한시적인 당백전 발행를 요청하게 됩니다.. 이때 만들어진 당백전이 아래의 유구통보 당백과 유구통보 반주 랍니다..

결국 3년 한시적으로 만든것에 대한 허가를 받은 사쓰마 번은 전국에 주화 전문가들을 초빙하여 본격적인 주화 주조에 들어가게 됩니다. 하지만 사쓰마 번은 유구통보만 만든 것이 아니라 중앙정부 몰래 천보통보 당백전까지 밀주하게 됩니다..하지만 이때 만들어진 천보통보 밀주는 이후 영국과 전쟁에서 큰 역할을 하게 됩니다

 

당시 일본 근대화 시절에는 막부의 전횡을 막고 서양의 침략을 막고자 하는 번주들이 생겼고 사쓰마번과 조슈번을 중심으로 존왕양이의 운동이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결국 이야기는 천황의 직접통치와 서양세력의 배척이라는 논리였답니다. ..이렇게 사쓰마번과 조슈번은 당시 막부도 함부로 하지 못할 정도의 실력과 영향력을 가진 번이었답니다..

나마무기( 生麦) 사건

1862년(분큐 2년), 사쓰마 번주 시마즈 모치히사의 아버지이자 번정을 이끌던 사쓰마 국부 시마즈 히사미쓰는 막부 정치 개혁한다는 대의명분을 내걸고 700명의 군대를 이끌고 에도로 상경한 후,  교토로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히사미쓰는 8월 21일에 에도를 출발하였고 인솔한 군대는 400여 명이었습니다.행렬이 나마무기 生麦村마을에 접어들면서 말을 탄 영국인 일행과 만났다. 이들은 요코하마에서 미국인이 운영하는 상점에 근무하던 우톱프 찰스 클라크(Woodthorpe Charls Clark)와 요코하마에 거주하던 비단 상인 윌리엄 마샬(William Marshall), 마샬의 사촌으로 홍콩에 거주하던 영국 상인의 아내이자 요코하마에 관광을 하러 와 있던 마가렛 보라데일 부인(Margaret Watson Borradail), 그리고 상하이에서 오랫동안 장사를 하고 있다가 역시 관광을 위해 일본을 방문하고 있던 찰스 레녹스 리처드슨(Charles Lennox Richardson) 일행이었다.

행렬의 선두에 있던 사쓰마 번사들은 정면에서 행렬로 말을 타고 들어온 영국인 4명에게 몸짓으로 엎드리는 방법을 제시하고 설명했지만, 영국 사람들은 ‘옆으로 통과’하라고 지시하는 것으로만 생각했고  행렬은 길 폭을 거의 다 사용하며 진행하고 있었으므로, 결국 네 사람은 점점 행렬 속을 거슬러 가게 되었습니다... 총포대도 일단 돌파하고 히사미쓰가 타는 있는 가마 근처까지 말을 몰고 갔고, 말을 내릴 생각은 하지 못했고, 이번에는 호위번사들이 ‘되돌아가라’고 말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말머리를 돌려 주위를 아랑곳하지 않고 멋대로 움직였다고 합니다.  그때 일분 몇 사람의 번사가  칼을 휘둘렀고4명은 놀라 도망치려고 했지만, 때는 이미 늦어 리처드슨은 중상을 입고, 오동나무집(桐屋)이라는 요리집 200m 정도 앞에서 낙마하면서 중지를 찔렸고 마샬과 클라크도 중상을 입고 보라데일 부인도 일격을 당했지만, 모자와 머리카락의 일부가 날아간 그대로, 가장 먼저 요코하마 거류지로 달려 돌아와 구원을 호소했다고 합니다..….

결국 이는 영국의 보복을 부르게 됩니다....즉 일본의 운명을 결정하는 사쓰에이 전쟁(薩英戰爭)의 서막이 시작된 것이죠…..다음번에 사쓰에이 전쟁(薩英戰爭)에 대한 게시글을 다뤄보겠습니다..

즐거운 수집생활되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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