앱테크 캐시워크 토스퀴즈 [일본] 사쓰에이 전쟁 (薩英戰爭) 살영전쟁 (2)
경제적 자유를 위하여

모두가 부자가 될수 없습니다. 그러나 당신은 됩니다..

주화 재테크/일본

[일본] 사쓰에이 전쟁 (薩英戰爭) 살영전쟁 (2)

화 수 분 2021. 10. 25. 08:55
반응형

화수분입니다..

유구통화 주화로 시작했는데 여기까지 와버렸네요 ..이왕온거 끝까지 파헤쳐 봅니다..

영국은 자국민이 살해된  나마무기 사건에 대한 책임과 피해 보상을 일본 막부정부에 요구하기에 이르렀고 막부는 사쓰마번 대신 배상금을 물어주었으나 살해자를 인도 받는 것에는 사쓰마번의 거부로 인하여 실패하게 됩니다..이에 영국정부는 막부가 실세가 아님을 인지하고 곧바로 사쓰마번을 응징하기로 결정합니다..

막부의 무능함이 여실히 드러나는 대목입니다...

1863 8 11, 영국 군함 7척은 사쓰마번을 응징하고 나마무기 사건에 대한 사쓰만 번의 추가 배상을 받기 위해 가고시마 해안으로 출격했습니다..사쓰마번은 나마무기 사건 이후  영국이 보복을 할 수 있었기 때문에 사쓰마번은 긴장하며 해안 포대를 정비하면서 방어에 전력을 쏟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쓰마번은 본래 외국과 교류가 많은 번이었던 만큼 일본 내 그 어느 번들보다 서양 세력의 무서움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이에 사쓰마번에서는 일단 교섭단을 파견해 영국측과 먼저 대화로 풀어보고자 했고  에도 막부측에서도 위기에 빠진 사쓰마번을 아주 모른 체 할 수도 없었기 때문에 통역관으로 후쿠자와 유키치를 파견하게 되었습니다.. (후쿠자와 유키치 현 일본 만엔권의 주인공이죠 ..^^)

영국와 사쓰마의 협상

하지만 에도 막부에서 파견한 통역관인 후쿠자와가 협상 내용을 오역하는 실수를 저지르면서 상황이 오히려 더 꼬이고 말았습니다.영국측은 사쓰마번이 나마무기 사건에 대해서 최대한으로 책임을 저야 한다고 요구했는데후쿠자와는 이를 실수로 사쓰마번의 최고 책임자가 처벌 받아야 한다고 오역을 하게 된 것입니다....나마무기 사건 의 최고 책임자라면 국부인 시마즈 히사미쓰이며 이는 히사미쓰를 영국으로 압송하겠다는 뜻이 되니 당연히 협상은 결렬될 수밖에 없었습니다...1863년 8 15, 영국은 공격을 개시하게 됩니다.. 

그런데 사실 영국은 처음부터 전쟁까지는 갈 생각이 없었고적당히 배상금만 뜯어 가는 게 목적이었기 때문에  대포에는 포탄이 장전되어 있지도 않았고탄약고 앞에는 에도 막부에서 받아낸 배상금이 쌓여 있던 터라 전투태세에 돌입하는데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었습니다..이에 영국은 굳이 사쓰마 포대와 교전하느니 배상금을 대신하여 해안가에 정박해 있던 사쓰마측의 증기선 3척을 나포하여 끌고 가기로 결심하엿습니다...

당시 영국의 가고시마 공격노선도

사쓰마번은 영국이 자신들의 군함을 탈취하려하자 이를 저지하기 위해 해안 포대에서 포격을 가하였고 영국군은 가고시마 해협의 비좁은 만에서 사쓰마번의 군함들을 이끌고 천천히 이동해야 했기 때문에 사쓰마군의 표적이 되기에 딱 좋았습니다...영국군은 생각보다 강력한 사쓰마군의 화력에 놀라 증기선 나포를 포기하고 귀중품을 탈취한 채 아예 그냥 격침 시켜버리기로 결정하였고  영국군은 사쓰마 군함들을 전소시킨 후 전열을 구축하며 사쓰마 포대에 응수하기 시작하였습니다...그런데 영국군은 가뜩이나 비좁은 해협에서 강풍이 부는 가운데 사쓰마군의 치명적인 십자포화를 받았기 때문에 고전을 면치 못하게 되었지만  영국 해군은 이런 악조건 속에서도 서서히 사쓰마군 포대를 하나하나 압도하며 압도적인 힘의 차이를 보여주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사쓰마군의 포대가 차례차례 무너지고 있을 무렵또 다시 뜻밖의 변수가 터지게 되었습니다...사쓰마군이 발사한 박격포 포탄이 우연찮게 영국군 기함에 작렬하면서 부함장이 전사하고 쿠퍼 제독도 부상을 입고 만 것입니다....영국군은 무려 기함이 대파 당하는 초유의 사태를 맞이했으며 설상가상으로 군함 레이스호가 기관 고장으로 해안 근처에서 좌초되는 등 악재가 연이에 계속되었습니다.. 그러나 해상 전력이 궤멸된 사쓰마군이 적극적으로 좌초된  레이스호를 나포하려 들지 않았기 때문에 레이스호는 우여곡절 끝에 다른 군함들에 의해 예인 될 수 있었습니다...전투가 생각처럼 풀리지 않자 격분한 쿠퍼 제독은 사쓰마 포대 뿐만 아니라 가고시마 시가지에 보복 포격을 가하였고  이 때  포격으로 가고시마는 가택 수 백 채가 전소되는 큰 피해를 입었으며그나마 주민들을 미리 대피시켰기에 인명피해는 크지 않았다고 합니다..영국군은 다음날 아침까지 가고시마 시가지를 향해 계속 포격을 퍼 붙다가 슬슬 석탄이 떨어지자 물러나게 되었고이에 사쓰마군도 시가지가 초토화 된 것에 대한 보복으로 비장의 병기인 기뢰를 설치하였고  당시 기뢰가 원시적이긴 했지만 그래도 군함 바로 밑에서 폭발하게 되면 큰 피해를 줄 수 있었습니다..다만 이 때 사쓰마군이 보유한 기뢰는 3개에 불과했기에 영국 군함들은 운이 좋게도 기뢰를 건들지 않고 지나감에 따라 별다른 효과를 볼 수 없었다고 합니다..

이로써 영국군은 사쓰마번에 대한 보복 공격을 마무리 짓고 가고시마 해협을 빠져나와 철수하게 되었고 전투 결과 사쓰마번은 5명의 전사에 9명 부상이었고영국군은 13명 전사에 50여명 부상으로 사실상 사쓰마번의 완승이었습니다.. 그리고 사쓰마번은 그 누구의 도움도 없이 독자적인 힘으로 무려 영국 함대를 격퇴하는 위업을 달성하게 된 것이었습니다...즉 동양이 서구열강을 격퇴한 상징적인 전쟁이 된것입니다.

비록 사쓰마번은 승리하긴 했지만 그로 인해 지불해야 하는 대가가 너무 컸습니다.. 가고시마 시내가 영국군에게 초토화됨으로써 사쓰마번이 오랜 세월 동안 공들여 온 산업 시설들이 잿더미가 되어버린 것이었습니다.. 이에 사쓰마번 내의 도막파들은 양이 전쟁이 실제로는 어렵다는 것을 인지하였으며  이는 차후 사쓰마번이 양이론을 더 이상 내세우지 않는 중요한 전환점을 마련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또한 영국도 일본의 저항이 만만치 않다는 것을 인지하여 영국의 동북아 침략 전략을 바뀌게 되는 전환점이 되었다고 합니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