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동개진(和同開珎)은 708년 8월 29일에 일본에서 주조 발행된 동전이고 일본에서 최초의 유통화폐라고 합니다.
지름 24mm 내외의 원형으로 가운데에는 한 변이 약 7mm의 정사각형의 구멍이 뚫려있는 원형방공 형식이고 표면에는 시계방향으로 화동개진(和同開珎)으로 표기되어 있다. 뒷면은 민무늬다.형식은 621년 발행된 당의 開元通寶를 본뜬 것이며 글씨체도 같다.율령 정부가 정한 통화단위인 한 푼으로 통용됐다.
708년 5월에는 은전이 먼저 발행되고 7월에는 동전이 주조되기 시작하여 8월에 발행되었음이 『속일본기』에 기록되어 있고 은전이 선행 발행된 배경에는 당시 사주였던 무문은전이 도읍에서 사용되었던 것에 대응하기 위해 사주의 무문은전을 화동개진 은전으로 전환하는 조치가 필요하였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은전은 이듬해 8월 폐지되었고 화동개진에는 두껍고 정밀치 못한 '고화동(古和洞)'과 얇고 정밀한 '신화동(新和同)'이 있으며 新和同 은 동전으로 밖에 발견되지 않은 점으로 미루어 은전 폐지 후에 발행된 것으로 보여지고 古和洞 은 화동개진(和同開珎) 초기 것이라는 설과 화동개보(和同開珎)을 정식으로 발행하기 전의 사주전 또는 샘플제품이라는 설이 있습니다. ..또한 古和同 과 新和同 은 성분도 다르며, 古和同 은 거의 순동에다 글씨체도 다르고 古和同 은 유통이 잘 되지 않고 출토 수도 한정되어 있으나 新和同 은 대량으로 유통되고 출토 수도 많고 다만 현재 고전 수집 목적으로 거래되고 있는 和銅銭 은 위작이 많아 주의가 필요하다고 합니다…
당시 일본은 아직 쌀과 천을 기준으로 물물교환 단계였으며, 和同開珎은 화폐로는 수도권 내와 그 주변을 제외하고 유통되지 않았다고 한다.또 동광 하나만 발견돼도 원호를 고칠 정도의 국가적 큰 사건으로 인식되던 당시 많은 양의 구리 확보가 어려웠고 유통량도 그리 많지 않았다는 분석도 있습니다.. 또한 당시 국가관이 농본사상의 관점에서 통화의 유통을 수도권내로 한정하고 지방으로 흘러 들어간 통화를 중앙으로 회수시킬 방침이었다는 설도 있습니다.. 그러나 지방에서는 부와 권력을 상징하는 보물로 사용되기도 하였다고 합니다. 이에 和同開珎의 발견지로는 전국 각지에 이르고 있으며 바다 건너 발해의 유적 등지에서도 和同開珎이 발견되고 있다고 합니다..
발행은 하였지만 통화라는 개념에 익숙하지 않은 당시의 사람들 사이에서 좀처럼 유통되지 않았기 때문에, 정부는 유통을 촉진하기 위해서 세금을 화폐로 납부하게 하거나 지방에서 세금을 내러 온 여행자에게 여비로 돈을 주는 등 여러 가지 방법을 사용하였으며 서기 711년에는 蓄銭叙位令이 선포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정부가 정한 가치가 현재의 가치에 비해 너무 높았기 때문에 발행 초기부터 민간에서 멋대로 발행된 사주전의 횡행과 화폐가치의 하락이 일어났고 이에 율령정부는 蓄銭叙位令 선포와 동시에 사주전 주조를 엄벌하고 주모자는 사죄, 종범자는 몰관, 가족은 유배하였지만 사주전은 계속 쏟아져 나왔고 화폐가치도 하락해 갔다고 합니다.. 서기 760년에는 万年通宝 가 발행되어 화동개보(和同開珎) 10장과 만년통보(万年通宝) 1장의 가치가 같은 것으로 정해 졌으나, 형태나 중량도 거의 같은 화폐를 극단적으로 다른 가치로 평가했기 때문에, 빚의 변제등의 혼란이 계속 되었지만 神功開宝 발행 후 서기 779년에 和同開珎、万年通宝、神功開宝 의 3전은 동일가를 갖는 것으로 보이며 이후 같은 가치의 통화로 혼용되었다고 합니다..
여하튼 이런 혼란스러운 화폐유통을 방지 하기 위해 서기796년에 화동개진(和同開珎), 만년통보(萬年通寶), 신공개보(神功開寶) 3전의 유통을 정지하는 조칙이 내려졌지만, 실제로 정지할 수 있었던 것은 807년의 일이며, 그것도 이듬해에는 취소되었다고 합니다… 여하튼 和同開珎은 그 이후에도 계속 다른 화폐와 혼용되어 유통되다가 유통에서 완전히 자취를 감춘 것은 9세기 중반으로 추정됩니다..
和同開珎 이전에 존재했던 화폐로서 무문은전과 부본전이 알려져 있고 .1999년 1월 19일에는 나라현 아스카무라에서 대량의 부본전이 발견되어 가장 오래된 화폐는 화동개진(和同開珎)이라는 정설이 뒤집히고 교과서가 다시 쓰여진다는 등 크게 보도되었지만 그러나 이것들은 넓은 범위에는 유통되지 않았을 것으로 보이며, 또 통화로서 유통됐는가 자체에 의문도 제기되고 있어 현재까지 和同開珎 은 확실히 광범위하게 화폐로 유통된 일본 최고(最古)의 화폐로 알려져 있다고 합니다..
화동개진(和同開珎)은 708년 8월 29일에 일본에서 주조 발행된 동전이고 일본에서 최초의 유통화폐라고 합니다.
지름 24mm 내외의 원형으로 가운데에는 한 변이 약 7mm의 정사각형의 구멍이 뚫려있는 원형방공 형식이고 표면에는 시계방향으로 화동개진(和同開珎)으로 표기되어 있다. 뒷면은 민무늬다.형식은 621년 발행된 당의 開元通寶를 본뜬 것이며 글씨체도 같다.율령 정부가 정한 통화단위인 한 푼으로 통용됐다.
708년 5월에는 은전이 먼저 발행되고 7월에는 동전이 주조되기 시작하여 8월에 발행되었음이 『속일본기』에 기록되어 있고 은전이 선행 발행된 배경에는 당시 사주였던 무문은전이 도읍에서 사용되었던 것에 대응하기 위해 사주의 무문은전을 화동개진 은전으로 전환하는 조치가 필요하였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은전은 이듬해 8월 폐지되었고 화동개진에는 두껍고 정밀치 못한 '고화동(古和洞)'과 얇고 정밀한 '신화동(新和同)'이 있으며 新和同 은 동전으로 밖에 발견되지 않은 점으로 미루어 은전 폐지 후에 발행된 것으로 보여지고 古和洞 은 화동개진(和同開珎) 초기 것이라는 설과 화동개보(和同開珎)을 정식으로 발행하기 전의 사주전 또는 샘플제품이라는 설이 있습니다. ..또한 古和同 과 新和同 은 성분도 다르며, 古和同 은 거의 순동에다 글씨체도 다르고 古和同 은 유통이 잘 되지 않고 출토 수도 한정되어 있으나 新和同 은 대량으로 유통되고 출토 수도 많고 다만 현재 고전 수집 목적으로 거래되고 있는 和銅銭 은 위작이 많아 주의가 필요하다고 합니다…
당시 일본은 아직 쌀과 천을 기준으로 물물교환 단계였으며, 和同開珎은 화폐로는 수도권 내와 그 주변을 제외하고 유통되지 않았다고 한다.또 동광 하나만 발견돼도 원호를 고칠 정도의 국가적 큰 사건으로 인식되던 당시 많은 양의 구리 확보가 어려웠고 유통량도 그리 많지 않았다는 분석도 있습니다.. 또한 당시 국가관이 농본사상의 관점에서 통화의 유통을 수도권내로 한정하고 지방으로 흘러 들어간 통화를 중앙으로 회수시킬 방침이었다는 설도 있습니다.. 그러나 지방에서는 부와 권력을 상징하는 보물로 사용되기도 하였다고 합니다. 이에 和同開珎의 발견지로는 전국 각지에 이르고 있으며 바다 건너 발해의 유적 등지에서도 和同開珎이 발견되고 있다고 합니다..
발행은 하였지만 통화라는 개념에 익숙하지 않은 당시의 사람들 사이에서 좀처럼 유통되지 않았기 때문에, 정부는 유통을 촉진하기 위해서 세금을 화폐로 납부하게 하거나 지방에서 세금을 내러 온 여행자에게 여비로 돈을 주는 등 여러 가지 방법을 사용하였으며 서기 711년에는 蓄銭叙位令이 선포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정부가 정한 가치가 현재의 가치에 비해 너무 높았기 때문에 발행 초기부터 민간에서 멋대로 발행된 사주전의 횡행과 화폐가치의 하락이 일어났고 이에 율령정부는 蓄銭叙位令 선포와 동시에 사주전 주조를 엄벌하고 주모자는 사죄, 종범자는 몰관, 가족은 유배하였지만 사주전은 계속 쏟아져 나왔고 화폐가치도 하락해 갔다고 합니다.. 서기 760년에는 万年通宝 가 발행되어 화동개보(和同開珎) 10장과 만년통보(万年通宝) 1장의 가치가 같은 것으로 정해 졌으나, 형태나 중량도 거의 같은 화폐를 극단적으로 다른 가치로 평가했기 때문에, 빚의 변제등의 혼란이 계속 되었지만 神功開宝 발행 후 서기 779년에 和同開珎、万年通宝、神功開宝 의 3전은 동일가를 갖는 것으로 보이며 이후 같은 가치의 통화로 혼용되었다고 합니다..
여하튼 이런 혼란스러운 화폐유통을 방지 하기 위해 서기796년에 화동개진(和同開珎), 만년통보(萬年通寶), 신공개보(神功開寶) 3전의 유통을 정지하는 조칙이 내려졌지만, 실제로 정지할 수 있었던 것은 807년의 일이며, 그것도 이듬해에는 취소되었다고 합니다… 여하튼 和同開珎은 그 이후에도 계속 다른 화폐와 혼용되어 유통되다가 유통에서 완전히 자취를 감춘 것은 9세기 중반으로 추정됩니다..
和同開珎 이전에 존재했던 화폐로서 무문은전과 부본전이 알려져 있고 .1999년 1월 19일에는 나라현 아스카무라에서 대량의 부본전이 발견되어 가장 오래된 화폐는 화동개진(和同開珎)이라는 정설이 뒤집히고 교과서가 다시 쓰여진다는 등 크게 보도되었지만 그러나 이것들은 넓은 범위에는 유통되지 않았을 것으로 보이며, 또 통화로서 유통됐는가 자체에 의문도 제기되고 있어 현재까지 和同開珎 은 확실히 광범위하게 화폐로 유통된 일본 최고(最古)의 화폐로 알려져 있다고 합니다..
화동개진(和同開珎)은 708년 8월 29일에 일본에서 주조 발행된 동전이고 일본에서 최초의 유통화폐라고 합니다.
지름 24mm 내외의 원형으로 가운데에는 한 변이 약 7mm의 정사각형의 구멍이 뚫려있는 원형방공 형식이고 표면에는 시계방향으로 화동개진(和同開珎)으로 표기되어 있다. 뒷면은 민무늬다.형식은 621년 발행된 당의 開元通寶를 본뜬 것이며 글씨체도 같다.율령 정부가 정한 통화단위인 한 푼으로 통용됐다.
708년 5월에는 은전이 먼저 발행되고 7월에는 동전이 주조되기 시작하여 8월에 발행되었음이 『속일본기』에 기록되어 있고 은전이 선행 발행된 배경에는 당시 사주였던 무문은전이 도읍에서 사용되었던 것에 대응하기 위해 사주의 무문은전을 화동개진 은전으로 전환하는 조치가 필요하였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은전은 이듬해 8월 폐지되었고 화동개진에는 두껍고 정밀치 못한 '고화동(古和洞)'과 얇고 정밀한 '신화동(新和同)'이 있으며 新和同 은 동전으로 밖에 발견되지 않은 점으로 미루어 은전 폐지 후에 발행된 것으로 보여지고 古和洞 은 화동개진(和同開珎) 초기 것이라는 설과 화동개보(和同開珎)을 정식으로 발행하기 전의 사주전 또는 샘플제품이라는 설이 있습니다. ..또한 古和同 과 新和同 은 성분도 다르며, 古和同 은 거의 순동에다 글씨체도 다르고 古和同 은 유통이 잘 되지 않고 출토 수도 한정되어 있으나 新和同 은 대량으로 유통되고 출토 수도 많고 다만 현재 고전 수집 목적으로 거래되고 있는 和銅銭 은 위작이 많아 주의가 필요하다고 합니다…
당시 일본은 아직 쌀과 천을 기준으로 물물교환 단계였으며, 和同開珎은 화폐로는 수도권 내와 그 주변을 제외하고 유통되지 않았다고 한다.또 동광 하나만 발견돼도 원호를 고칠 정도의 국가적 큰 사건으로 인식되던 당시 많은 양의 구리 확보가 어려웠고 유통량도 그리 많지 않았다는 분석도 있습니다.. 또한 당시 국가관이 농본사상의 관점에서 통화의 유통을 수도권내로 한정하고 지방으로 흘러 들어간 통화를 중앙으로 회수시킬 방침이었다는 설도 있습니다.. 그러나 지방에서는 부와 권력을 상징하는 보물로 사용되기도 하였다고 합니다. 이에 和同開珎의 발견지로는 전국 각지에 이르고 있으며 바다 건너 발해의 유적 등지에서도 和同開珎이 발견되고 있다고 합니다..
발행은 하였지만 통화라는 개념에 익숙하지 않은 당시의 사람들 사이에서 좀처럼 유통되지 않았기 때문에, 정부는 유통을 촉진하기 위해서 세금을 화폐로 납부하게 하거나 지방에서 세금을 내러 온 여행자에게 여비로 돈을 주는 등 여러 가지 방법을 사용하였으며 서기 711년에는 蓄銭叙位令이 선포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정부가 정한 가치가 현재의 가치에 비해 너무 높았기 때문에 발행 초기부터 민간에서 멋대로 발행된 사주전의 횡행과 화폐가치의 하락이 일어났고 이에 율령정부는 蓄銭叙位令 선포와 동시에 사주전 주조를 엄벌하고 주모자는 사죄, 종범자는 몰관, 가족은 유배하였지만 사주전은 계속 쏟아져 나왔고 화폐가치도 하락해 갔다고 합니다.. 서기 760년에는 万年通宝 가 발행되어 화동개보(和同開珎) 10장과 만년통보(万年通宝) 1장의 가치가 같은 것으로 정해 졌으나, 형태나 중량도 거의 같은 화폐를 극단적으로 다른 가치로 평가했기 때문에, 빚의 변제등의 혼란이 계속 되었지만 神功開宝 발행 후 서기 779년에 和同開珎、万年通宝、神功開宝 의 3전은 동일가를 갖는 것으로 보이며 이후 같은 가치의 통화로 혼용되었다고 합니다..
여하튼 이런 혼란스러운 화폐유통을 방지 하기 위해 서기796년에 화동개진(和同開珎), 만년통보(萬年通寶), 신공개보(神功開寶) 3전의 유통을 정지하는 조칙이 내려졌지만, 실제로 정지할 수 있었던 것은 807년의 일이며, 그것도 이듬해에는 취소되었다고 합니다… 여하튼 和同開珎은 그 이후에도 계속 다른 화폐와 혼용되어 유통되다가 유통에서 완전히 자취를 감춘 것은 9세기 중반으로 추정됩니다..
和同開珎 이전에 존재했던 화폐로서 무문은전無文銀銭과 부본전富本銭이 알려져 있고 .1999년 1월 19일에는 나라현 아스카무라에서 대량의 부본전이 발견되어 가장 오래된 화폐는 화동개진(和同開珎)이라는 정설이 뒤집히고 교과서가 다시 쓰여진다는 등 크게 보도되었지만 그러나 이것들은 넓은 범위에는 유통되지 않았을 것으로 보이며, 또 통화로서 유통됐는가 자체에 의문도 제기되고 있어 현재까지 和同開珎 은 확실히 광범위하게 화폐로 유통된 일본 최고(最古)의 화폐로 알려져 있다고 합니다..
다음 게시글에선 부본전(富本銭)에 대해선 알아보겠습니다...
즐거운 수집생활 되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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