앱테크 캐시워크 토스퀴즈 [일본역사] 전국시대 다이묘 우키다 히데이에 (宇喜多秀家)
경제적 자유를 위하여

모두가 부자가 될수 없습니다. 그러나 당신은 됩니다..

주화 재테크/일본

[일본역사] 전국시대 다이묘 우키다 히데이에 (宇喜多秀家)

화 수 분 2022. 3. 17. 20:51
반응형

화수분입니다금번  세키가하라 전투에 대하여 정리하며,, 서군 우키다 군을 진두 지휘한 우키다 히데이에라는 인물에 관심이 가게 되었습니다. 이 인물은 임진왜란시 행주대첩시 왜장이었던 인물이기도 합니다..

우키다 히데이에 그는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양자이자 조선침략(임진왜란)의 총사령관 이기도 한 인물입니다...

우키다 히데이에는 1581년에 부친인 우키타 나오이에가 병사하자, 열살의 어린 나이로 오다 노부나가에 의해 1582 가독과 영지를 승계하고 보장받게 된다.

우키다 히데이에의 영지와 오카야마 성

이에 히데요시는 명문가이자 유명한 간웅이었던 우키타 나오이에가 자신에게 최후를 부탁하는 모습을 거절할수 없기도 했고, 모리 가문과 함께 맞서 싸우고 있는 우방이니 그의 부탁을 수락하여 우키타 가문의 본령을 그대로 히데이에에게 계승시켜 주는 후견인이 되었고 그 덕분에 우키타 히데이에는 어릴 시절 부터 히데요시의 밑에서 자라게 되는데, 히데요시는 말년에 요도도노가 아들 츠루마츠와 히데요리를 낳기 전까지 아들이 없었으므로 히데이에를 아들처럼 여기며 매우 아꼈다고 합니다..

 이후 히데이에는 히데요시의 양자가 되었으며,  도요토미 가문의 성 씨와 이름 중 한자()를 하사 받았고, 실제로도 사석에서도,  공석에서도 항상 자신을 도요토미 히데이에 (豊臣秀家)로 지칭하기도 합니다..

반면에 가토 기요마사와 같이 네네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정실) 라인인 무장들과의 사이는 별로 좋지 못했다고 한다.

(드라마 징비록 캡쳐)

히데이에는 성인이 되자 히데요시의 이름에서 한자(/히데)를 받았으며, 1586 히데요시의 양녀이자 마에다 토시이에의 딸인 고히메()를 정실로 들이게 됩니다이러한 경위로 히데이에는 도요토미 정권하에서 강력한 권력을 가질 수 있었고, 또한 이에 부응하여 히데요시 생전에는 5 대로(老)의 한 사람으로서 5 대로중 한사람이었던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견제하였으며, 사후에 벌어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는 서군에 참가한 무장 중 가장 많은 수의 군대를 이끌고 참가하여 분전하는 등, 충성을 다하였습니다.. 실제로도 자신을 우키타 히데이에라고 지칭하지 않았으며, 자신을 우키타 가문의 사람이 아닌 도요토미 가문의 사람이라는 의식이 더 강하였다고 합니다

1592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제8군을 지휘하는 총대장으로서 참전했다가행주대첩  권율의 조선군에 대패하고 자신도 부상을 입게 되는데 이때 무리하게 공격을 감행하다가 자신의 대장기가 있는 쪽에 조선군이 집중포격을 가해서 하마터면 목숨을 잃을 뻔 했는데, 병사들이 그를 업고 달려 간신히 살아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이외에도 독성산성에 포위된 권율이 쌀로 말을 씻기는걸 보고, 조선군 측에 물이 풍부한 줄 알고 포위를 풀어 버렸다는 설화가 유명합니다… 이는   세마역의 역명(세마)의 유래가  여기서 유래되었다고 하네요

 하지만 이후 벽제관 전투나 2차 진주성 전투 에서의 승리로, 중납언(中納言)에 임명되기도 합니다히데이에는 임진왜란의 굵직한 전투에 이름을 올리고, 나름대로 성과를 올리기도 하였는데 히데요시는 조선과 명을 굴복시키게 되면 조선의 통치자로서 히데이에를 임명할 계획이었다고 하네요

우키다 가문의 문장

​결국 이렇게 히데요시 치세에선 막강한 권한을 가졌었지만  히데요시 사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서군에 속하여 초반에는 후쿠시마 마사노리가 이끄는 동군과 격전을 펼쳤으나코바야카와 히데아키등의 배신으로 전세가 급속히 불리해지자 결국 패배, 사쓰마 번의 시마즈 요시히로의 영지로 도망치는 형편으로 전락하게 됩니다..… 

세키가하라 에서이 우키다 군..(영화 세키가하라 전투 캡춰)

시마즈 가문이 그를 숨기고 있다는 소문이 돌고 이에야스가  우키다히데이에에 대한  체포령을 명하자, 요시히로의 아들 시마즈 타다츠네는 숨겨둔 사실을 인정하고, 1603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그를 넘기게 됩니다

이후 타다츠네와 처남인 마에다 토시나가의 탄원으로 구노산 도죠쿠에 유폐되었다가, 곧 일가족 전부   하치죠지마(八丈島)로 추방되게 됩니다

하치죠지마

토요토미 히데요시 치세에서  대부분의 전략이나 전술, 정치적 사안 처리는 이시다 미츠나리가 맡았고, 우키다 히데이에는 이렇다 할 역할을 하지 못하였으니 이에야스에게는  우키다 히데이에는 커다란 위협으로  느껴지지 못했을 가능성이 컸을 것으로 보입니다.. 어쨌거나 히데이에는 유배지 하치죠지마 에서 50여 년을 보내다가, 다시는 본토의 땅을 밟지 못하고 1655, 83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결국 임진왜란과 세키가하라 전투에 참가한 다이묘 중 가장 오래 생존한 인물인 셈입니다

아이러니 하지만 전국시대에 멸문되어 버린 전국시대의 여러 가문들 중에서 온전히 남아, 평온하게 혈통을 보전하는데 성공한 점에서는 진정한 의미의 승리자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