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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역사] 세키가하라 전투 (関ヶ原の戦い) 이시다 미쓰나리 , 시마사콘

화 수 분 2022. 3. 15. 1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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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수분입니다. 

오늘 세키가하라 전투에 대해서 이야기 해보려고 합니다.

아마도 일본인들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일본에선 가장 유명한 전투죠...하지만 우리에게 조금 생소할 수 도 있는 전쟁입니다.

한마디로 이야기 하면 임진왜란이후 (토요토미 히데요시 사후) 동군과 서군으로 나누어진 일본의  두세력이 일본의 패권을 결정했던 단 하루의  전투를 의미한답니다...

세키가하라 전투

주말에 우연찮게 세키가하라 전투라는 영화를 보고 궁금해졌답니다.. 세키가하라 전투는 어떤 의미의 전투였고 우리에겐 또한 어떤 의미가 있는 전쟁이었는지...

 

서군 대장 이시다 미쓰나리

동군대장 도쿠가와 이에야스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오른팔이었던 이시다 미쓰나리는 무관이라기  보다 문관에 가까운 인물이라...기존의 임진왜란에 참전했던  무장세력이었던 가토 기요사마사 등과는 적대적인 관계 였다고 합니다...이와 반대로 기독교도였던 고니시 유키나가와는  우호적인 관계를 맺고 있었다고 합니다...결국 이를 계기로 고니시 유키나가는 서군에 .....가토기요마사는 동군에 가담하게 되죠....

세키가하라 전투는 1600년 9월 15일,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이끄는 동군 10만 명과 이시다 미쓰나리가 이끄는 서군 8만 명이 도요토미 사후 정권의 주도권을 놓고 지금의 기후 현에 위치한 세키가하라에서 싸운 전투를 가리킵니다..이 전투에서 승리한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이후 에도 막부를 설립하기 위한 토대를 마련하였기  때문에 이 전투를 ‘천하를 판가름하는 싸움’이라고도 부르기도 합니다..

1598년에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은 뒤, 다섯 명의 다이로() 중에서 가장 유력한 위치에 있던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사실상 정국을 주도하게 됩니다.... 이에 대해 다이로 중 한 명인 우에스기 가게카쓰와 다섯 명의 봉행(, 행정 · 재판 · 사무 등을 담당하는 무사의 직명) 중 한 명인 이시다 미쓰나리가 강력반발하게 됩니다...토요토미 히데요시는 죽어가면서 유언으로 아들인 히데요리의 뒷일을 이시다 미쓰나리에게 부탁하였다고 합니다...이에 미쓰나리는 히데요리를 지키기 위하여 동분서주하게 됩니다... 결국 이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충돌을 하게 되고 말죠 ...

이시다 미쯔나리

 

이시다 미쓰나리 가문의 문장

대일대만대길(大一大万大吉)이란 ‘한 사람이 모두를 위해, 모두가 한 사람을 위해 노력한다면 천하는 행복해진다는 의미

예전이 미쓰나리의 가문 문장이 우리나라 예능프로에 나와서 문제가 되었었죠 ...이시다 미쓰나리는 임진왜란에 참전하여 우리의 권율장군에게  행주산성에서 패배한 일본장수이기도 합니다...결국 방송사에서 사과하는 것으로 마무리 되었다고 하네요 ...아마 아무 생각없이 소품으로 사용하지 않았을까 합니다...

 

1600년 7월 이에야스는 가게카쓰를 토벌하기 위해 다이묘들을  동원하여 아이즈로 향했는데, 도중에 미쓰나리가 이에야스를 타도하기 위해 군사를 일으켰다는 소식을 듣고 방향을 돌려 세키가하라로 향하게 됩니다...

전투는 후쿠시마 마사노리 부대의 제지 명령을 무시하고 이이 나오마사 부대가 우키타 히데이에 군에 발포한 것을 시작으로 전개되었다. 전투 초반 후쿠시마 마사노리는 수적 우위에 있던 우키타 히데이에 군을 공격했으나, 도요토미 가문을 위한 성전이라 믿는 우키타 히데이에 군의 높은 전의와 우키타 부대의 전위에 있던 아카시 다케노리의 8천부대의 총공격에 후쿠시마 마사노리는 궤멸 위기에까지 몰리게 된다. 우키다 군의 추격은 동군 진영에 있던 가토 요시아키 군과 쓰쓰이 사다쓰구군이 후쿠시마 군을 원조하여 멈추었으며, 게다가 서군측은 우키다 군을 제외하고는 크게 움직이지 않았기에 우키다 군은 깊이 추격하지 않고, 군대를 정리하게 됩니다..

오타니 요시쓰구는 도도 다카토라,교고쿠 다카토모, 데라자와 히로타카 부대를 맞이하여 일진일퇴의 격전을 치르고 있었으며,고니시유키나가는 오다 나가마스, 후루타 시게카스 군과 전투를 수행하고 있었고  사쓰마 번의 시마즈 요시히로부대는 진격해온 이이 나오마사 군을 맞았으나 시마즈 군은 격렬하게 응전하지 않은채 진(陳) 안에서만 응전할 뿐이었습니다..

한편 서군에서 전의가 가장 높았던 이시다 미쓰나리의 부대에는 호소카와 다다오키, 구로다 나가마사, 다나카 요시마사등이 공격을 감행하였다. 또한 후쿠시마 마사노리를 구원하고 방향을 바꾼 가토 요시아키의 부대 역시 미쓰나리의 부대를 함께 공격하여, 미쓰나리는 배 이상의 적에게 공격을 받았고  동군의 각 제장들은 사실상 서군의 대장이라 할 수 있는 미쓰나리의 진영으로 쇄도하여 전쟁의 최대 공훈을 세우려 하였으나, 미쓰나리 부대는 이들을 맞이하여 싸웠으며, 오히려 마 사콘,가모 사토이에와 같은 장수들의 분전으로 인해, 공격해온 적을 격퇴하여 전투 초반의 전세를 서군에 유리하게 이끌었다고 합니다..

시마 사콘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이시다 미쓰나리의 휘하의 장수중 가장 부러워 했다는 장수)

정오가 가까워지도록 전황은 여전히 서군이 우세하였고  양군 모두 20~30% 정도만 싸우고 있었습니다....이 전투 초반의 전황은 동군에게 불리하였고, 내통을 약속한 부대들도 관망하였으므로, 초조해진 이에야스는 본진을 모모쿠바리 산(桃配山)에서 이시다 군과 시마즈 군과의 500미터 거리 지점으로 진을 전진시켜 전장으로 나왔지만 좀처럼 전황이 바뀌지 않자, 내통을 약속한 고바야카와 군이 진을 치고 있던 마쓰오 산에 포격을 감행하였고 이후 1만 5천의 고바야카와 군은 서군을 배신하여 산을 내려왔으나,고바야카와 히데아키의 배신을 이미 예상하고 있었던 오타니 요시쓰구는 400명의 직속부대로 반격을 감행하였고 그는 고바야카와 군의 1진과 2진을 격퇴하였고, 고바야카와의 대군을 300미터 정도 후퇴시키며 분전하였으나 자신의 지휘아래 두었던 와키자카 야스하루 등의 부대가 고바야카와의 부대에 호응하여 마쓰오 산을 내려오며 배신하자  중과부적으로 궤멸하였다고 합니다....

고바야카와 히데아키의 배신으로 전황이 급속히 바뀌어 동군이 우세하게 되었고, 오타니 요시쓰구를 비롯하여 우키타 히데이에의 부대와 이시다 미쓰나리의 부대도 패주하게 되었다고 합니다...이렇게 해서 일본 전체의 명운이 걸렸던 세키가하라 전투는 단 하루 만에 막을 내렸고  결국 9월 15일 아침부터 시작된 전투는 서군의 고바야카와 히데아키의  배신으로 하루 만에 동군의 승리로 끝이 나게 됩니다...

미쓰나리의 처형으로 인하여 도쿠가와 시대가 열리게 됩니다. 영화에선 이시다 미쓰나리를 좋게 평가를 햇지만 실제 일본의 역사서에서는 이시다 미쓰나리를 악인으로 표현하고 있답니다. 하지만 역사는 승자의 역사이기에 이번 영화에서 표현한 이시다 미쓰나리는 대의 명분을 중시하는 대인배로 표현되고 있답니다...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승리했다는 소식이 전국으로 퍼지면서 도호쿠, 호쿠리쿠, 규슈 등지에서 벌어지던 소소한 전투도 빠르게 마무리되게 되고  이후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오사카 성에 입성하여 서군에 참가한 다이묘 약 100여 명의 영지 660만 석(고쿠)을 빼앗거나 감봉 조치하고 전국의 실권을 장악하게 되어 에도 막부의 토대를 쌓게 됩니다..

결국 세키가하라 전투로 인하여 일본의 전국시대가 마무리되면서 평화시대가 오게 됩니다....또한 임진왜란으로 적을 두게된 조선과도 도쿠가와 이에야스 가문의 군대는 조선에 출병하지 않았다는 이유와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임진왜란에 대한 유감표명으로  화친을 하게 되어 통상을 재개하게됩니다...

  

일본은 이 전쟁을 토대로 일본의 가장 평화로운 시대였던 250여년 가까운 도쿠가와 막부 시대를 열게 된답니다.....

 

 

지금은 위와 같이 세키가하라 역이 생겨 이 전적지를 누구라도 관광할 수 있답니다..

나중 일본출장 시 시간과 공간이 된다면 함 가볼 생각이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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